’70억 가지 삶 노래한’ 방탄소년단, 美 백악관서 다양성 상징되다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 70억 가지의 월드(world) / 70억 가지의 삶 도시의 야경은 / 어쩌면 또 다른 도시의 밤 / 각자만의 꿈 렛 어스 샤인(Let us shine) / 넌 누구보다 밝게 빛나”(소우주)
글로벌 수퍼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대표곡 중 하나인 ‘소우주'(‘맵 오브 더 솔 : 페르소나'(2019) 수록곡)는 다양성을 상징하는 곡으로 꼽혀왔다. 세계 인구수를 뜻하는 ’70억’이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이 곡은 한명 한명이 그 자체로 빛나는 별이자 각자에겐 광활한 우주가 있다는 걸 노래한다. 방탄소년단 래퍼 라인인 RM·슈가·제이홉이 작사·작곡에 참여했다.
방탄소년단이 미국 백악관에서 명실상부 다양성의 상징이 됐다. 멤버들은 5월31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전 백악관 브리핑룸을 방문해 반 아시아계 혐오 범죄와 아시아계 포용 그리고 다양성에 대해 연설했다.
검은 정장에 검은색 넥타이, 흰 셔츠를 차려입은 방탄소년단 멤버들 중 RM은 영어로 나머지 멤버들은 한국어로 입장을 전달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평등은 시작”
제이홉은 “오늘 저희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저희의 음악을 사랑해주시는 다양한 국적·언어·문화를 가진 저희의 팬 아미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정국도 “한국인의 음악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넘어서 전 세계의 많은 분들께 닿을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 이 모든 걸 연결시켜주는 음악이 참 훌륭한 매개체가 아닌가 싶다”고 여겼다.
슈가는 “나와 다르다고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평등은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뷔(V)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 한사람 한사람이 의미있는 존재로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기 위한 또 한걸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방탄소년단의 브리핑은 백악관 트위터를 통해 생중계됐는데, 시청자 수가 5만여명에 달했다. 백악관 브리핑룸도 평소보다 훨씬 많은 기자들로 북적였다.
협업곡 포함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 1위에 여섯곡을 올리고, 그래미 어워즈에 2년 연속 노미네이트되는 등 음악계에 큰 성과를 거두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방탄소년단에 대해 “그래미 후보에 오른 국제적 아이콘이자 청소년에게 존경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방탄소년단의 만남은 아시아계 미국인 및 하와이·태평양제도 원주민(AANHPI)의 달을 맞아 조율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방준비제도와 연방 판사 인선에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를 대거 배치하는 등 일찌감치 다양성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바이든 대통령과 방탄소년단은 이번 만남에서 아시아계 대표성 문제를 비롯 코로나19 이후 부상한 반(反)아시아 혐오 범죄와 차별 등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인종 증오범죄는 최근 미국 내에서 줄어들기는커녕 더 증가하고 있다. 얼마 전 뉴욕 전철역에서도 흑인 남성들이 아시안 남성을 집단 폭행하는 영상이 소셜 미디어에 퍼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차별 반대의 목소리 꾸준히 내온 방탄소년단…”아시안인으로 차별 당한 적 있어”
백악관은 전 세계적인 영향을 자랑하는 방탄소년단이 차별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다시 목소리를 내주면 경각심을 더 고취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팝의 아이콘뿐만 아니라 다양성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방탄소년단은 미국 등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아시아계 혐오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뜻을 밝혀왔다.
작년 3월 애틀랜타에서 백인 남성의 총격으로 한국계를 포함한 아시아계 8명이 사망했을 당시 방탄소년단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슬픔과 함께 진심으로 분노를 느낀다”며 ‘#StopAsianHate'(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를 멈춰라), ‘#StopAAPIHate'(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를 멈춰라)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아시아인 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했다.
또 지난해 11월 LA 소파이 스타디움 공연 당시 현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방탄소년단 리더 RM은 아시안 혐오와 관련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항상 내고 싶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은 재작년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와 관련, BLM 측에 약 100만 달러(약 12억원)를 기부하기도 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152개 재외공관과 협력해 발간한 ‘2021 지구촌 한류현황’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지난해 12월 기준 1억5660만명으로 2012년(당시 926만명)에 비해 17배나 증가한 숫자다. 미주 지역은 그 사이 한류 팬이 22배나 늘어났을 정도로 한류 열풍의 중심지역이 됐다.
하지만 K팝의 위상이 높아지는 동시에 이를 경계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 혐오나 꼬투리잡기도 확산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방탄소년단을 겨냥한 혐오가 난무했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자신들도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기억이 있다”고 했다. “길을 걷다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듣고, 외모를 비하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시안이 왜 영어를 하느냐는 말도 들어봤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경험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면서도 “하지만 그때 겪은 일들은 저희를 위축시켰고 자존감을 앗아가기도 했다. 하물며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증오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건 저희 가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라고 토로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시안으로서 저희의 정체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얘기다.
실례로 작년 독일의 한 라디오방송 진행자는 방탄소년단의 콘서트를 코로나19에 비유하는 등 막말을 해 논란을 자초했다. 호주의 공영 방송과 그리스TV에서도 방탄소년단 외모 등을 비하했고 논란이 지속되자 사과했다.
특히 미국의 수집용 일러스트 카드 제작사 ‘톱스(Topps)’가 ‘그래미 어워즈’를 기념해서 발행한 카드에 방탄소년단 멤버들을 ‘두더지 잡기’ 게임기 속 두더지로 표현,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다.
방탄소년단의 팬으로도 알려진 USA투데이의 파티마 파르하(Fatima Farha) 에디터는 트위터에 “그건 풍자가 아니다. 완전한 인종차별주의다. 이런 시기에 아시아 그룹을 향한 폭력 묘사는 혐오스럽고 위험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 중심으로 연대한 K팝 팬들
방탄소년단을 비롯 K팝 가수들은 이런 상황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자칫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혐오·차별주의자의 표적이 되거나 더 심한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팬집단인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를 중심으로 한 K팝 팬덤이 대신 나서고 있다. 세계 곳곳의 정치적인 사안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중이다.
재작년 바이든 대통령과 경합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유세 현장이 ‘노쇼’로 텅 비어 있던 이유는 K팝팬이 중심이 된 10대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콘서트장 예매에 익숙한 K팝 팬들이 자신들의 장기를 발휘해 참석 신청을 했다가 골탕을 먹였다.
트와이스의 ‘필 스페셜(Feel Special)’은 미국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제친, 바이든 대통령의 역전극을 축하하는 주제가로 통하기도 했다. 접전지 중 하나였던 조지아주에서 바이든이 역전승을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 네티즌이 만든 영상 배경 음악이 ‘필 스페셜’이었기 때문이다.
또 K팝 팬들은 작년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 ‘블랙 라이브스 매터’와 관련해서도 꾸준히 목소리를 냈다. 미국 경찰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불법 시위대를 신고해 달라고 하자, K팝 스타들의 영상을 올리며 오히려 이를 마비시켰다.
이와 함께 태국 방콕 시내의 민주화 시위대 물결 사이에서는 블랙핑크의 대표곡 ‘킬 디스 러브(KILL THIS LOVE)’가 울려퍼지기도 했다.
사실 K팝과 K팝 그룹만큼 탈정치화된 노래와 가수는 없다. 국내 기획사들이 제작할 때부터 의도적으로 정치와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이념이 극심하게 갈라져 있는 한국 지형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해외에선 K팝이 정치적 행동의 대표주자가 됐다.
초창기 K팝을 소비했던 주요 팬층이 소수자였다는 점의 영향이 크다. K팝에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져 있지 않더라도, 이들이 K팝을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또 다른 정체성으로 삼은 것이다. 아울러 다양한 인종이 집단화돼 있는 K팝 팬덤의 성향이 정치적인 사안에 단체로 목소리를 내는데 효율적이라는 측면도 작용했다.
이처럼 K팝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대·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정치적 도구가 됐다. K팝 그룹이 혐오·차별의 대상이 될 때마다, 아티스트를 대신해 팬덤이 활약하는 건 당연하다.
특히 조직력과 연대가 뛰어난 방탄소년단 팬덤 아미가 사회적인 선한 영향력을 과시해왔다. 그리고 방탄소년단은 K팝 아이돌로는 드물게 팬덤의 목소리에 맞춰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K팝의 거대한 금기를 깨고 있나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이미 다른 K팝 그룹과 다르게 자신들의 가치관과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왔다.
미국의 권위 있는 음악 잡지 ‘롤링스톤’은 지난 2018년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K팝의 거대한 금기를 깨고 있나'(How BTS Are Breaking K-Pop’s Biggest Tabbos)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한국에서 팝스타와 정치는 섞이지 않는 점을 특정하면서, 방탄소년단이 이 공식을 깨는 행보를 해왔다고 분석했다.
성소수자(LGBTQ)의 권리, 정신건강, 성공에 대한 압박 등 한국사회에서 금기시되는 주제를 노래해왔다면서 패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또 아울러 여타 다른 아이돌과 달리 사건, 사고에 연루되지 않은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노래를 만들 때는 비평적인 시선을 유지한다는 점도 짚었다. 방탄소년단 그리고 소속사 하이브가 유니세프(UNICEF)와 손잡고 시작한 아동·청소년 폭력 근절 캠페인 등에서도 상세히 소개했다.
RM이 한국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점도 톺아봤다. RM은 동성애를 다룬 미국 힙합듀오 ‘맥클모어&라이언 루이스’의 ‘세임 러브’, 커밍아웃한 가수 트로이 시반의 ‘딸기와 담배’를 소셜 미디어 등에 추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