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집권 1, 2기 경제를 이끈 리커창 전 국무원 총리가 27일 6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날 관영 중국중앙(CC) TV 등은 리 전 총리가 전날 상하이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응급 치료를 받았지만, 27일 오전 0시 10분(현지시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공식) 부고를 곧 낼 것이라고 부연했다.
리 전 총리는 중국공산당 내 주요 파벌인 ‘공청단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혁명 원로 자제로 구성된 태자당 출신 시 주석과 함께 ‘5세대 지도자’로 불린다. 2013년부터 올해 3월까지 10년 동안 ‘중국 2인자’인 국무원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공식적으로 경제 정책을 총괄했다.
한때 시 주석의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시진핑 1인체제가 강화되면서 충성을 증명해야 했고, 시 주석의 그늘 아래 비운의 총리로 불린다.
1955년 7월, 리커창은 안휘성 허페이의 지방관리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성장 과정에서 그의 부친 리펑산(李奉三)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았다. 리펑산은 일찍이 안후이성 펑양현장을 지낸 바 있고, 그 후에 안휘성 지방지판공실 부주임으로 있다가 퇴직했다.
똑똑하고, 어려서부터 공부가 취미였다는 리커창은 성적이 뛰어났지만 동란의 문화대혁명 시대를 거치며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1974년 그는 펑양현의 한 시골 마을에 당시 이른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으로 농촌에 투입돼 육체노동을 경험한 한 명의 ‘즈칭(知靑·지식청년)’이됐다.
그 뒤로 1977년 중국에서 대학입시 제도가 부활하자 그는 첫해에 펑양현 최고의 성적으로 명문대 베이징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이후 이 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리커창의 대학 동기들은 훗날 그가 학교 식당에서 줄을 설 때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영어 단어를 외울 정도로 ‘공부 벌레’였고, 영어 성적이 뛰어났다고 밝혔다.
이후 공청단 조직 내에서 5년 간의 후계자 양성 과정을 마친 그는 전격적으로 여러 지방을 돌면서 후계자 양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98년 43세의 리커창은 허난(河南)성의 성장, 부서기로 임명됐고 그 다음해 1인자인 서기직에 올랐다. 또한 2004년에는 공업 대성(大省)인 랴오닝(遼寧)성으로 옮겼다.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리커창은 시진핑과 함께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공식적으로는 차기 지도부의 두 핵(核)가운데 하나가 됐고, 비공식적으로 대결을 벌이는 라이벌이 됐다.
후진타오 전 주석이 자기 파벌인 리커창을 차기 국가주석 후보로 적극 추천했지만,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의 권력 암투에서 졌기 때문에 리커창이 일인자의 자리를 시진핑에 빼앗겼다는 설도 있다. 또한 시진핑이 대체로 원만한 성격에 비해 더 적극적이고 다혈질로 알려진 리커창은 공산당 지도층에서 금기 사항인 ‘나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서 공산당 원로들이나 중앙위원들의 눈에 나 인기가 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시지핑 집권 1, 2기 경제 총책을 총괄하면서 리커창은 친시장적인 시장주의자로 평가받았고, 시진핑의 경제 정책과 다른 시각을 드러내 균형추 역할을 했다고 평가도 있다.
또한 시진핑 1인 독주 체제가 강화된 상황에서도 결정적 시기마다 한번씩 소신 발언을 해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 주석의 강력한 ‘제로 코로나’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진핑이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면서 리커창은 시진핑이 주도하는 경제 정책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존재감이 옅어지다가 지난 3월 전인대에서 후임인 리창 총리에게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