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형사재판소(ICC) 검찰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해 전쟁범죄 혐의 등으로 체포영장을 청구한 가운데, 미국과 독일, 영국 등은 이를 강력 비판하는 반면, 프랑스와 벨기에 등은 반대로 지지를 표명하면서 서방 사이에서 미묘한 균열 조짐이 일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수출·지원과 휴전 협상안을 놓고 서방이 이견을 드러낸 데 이어, 네타냐후에 대한 사법처리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장기화와 맞물려 또 다른 뇌관으로 급부상하는 양상이다.
20일(현지시각) 주요 외신에 따르면 카림 칸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을 포함해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네타냐후 총리와 갈란트 국방장관은 전쟁의 수단으로 기아를 유발하고, 인도주의적 구호물자를 거부하고, 고의적으로 민간인을 표적으로 삼아 말살시킨 혐의를 받고 있다. ICC 검찰은 성명을 통해 “이러한 행위는 책임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처벌하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ICC 검찰의 영장청구 절차에도 흠결이 있다고 주장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검찰의 의도가 무엇이든간에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전혀 동등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국제사법재판소, 푸틴에 체포영장 발부…바이든, ICC 푸틴 체포 영장 발부 정당하다 직격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별도 성명에서 “우리는 검찰이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동일시한 것을 거부한다. 부끄러운 일”이라며 “하마스는 홀로코스트 이래 최악의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잔인한 테러조직이며, 여전히 미국인을 포함해 수십명의 무고한 인질을 잡고 있다”고 강조했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 소통보좌관은 “푸틴은 민간인을 살해할 목적으로 고의로 민간인 시설을 목표로 삼았고, 그것은 그의 운용전략에 포함됐다”며 “이스라엘군(IDF)이 그러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고 비교했다.
영국은 국제형사재판소가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하는 데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외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것이 인질 구출, 구호, 지속 가능한 휴전 달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며 “처음부터 말했듯이, 우리는 ICC가 이 사건에 대한 관할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영국 외무부는 또 “영국은 아직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로마법’의 당사국이 아니다”라며 “ICC 예심부가 검찰의 영장 청구를 고려하기 전에 추가 대응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체코의 페트르 피알라 총리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치를 두고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난했다.
피알라 총리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 대표와 이슬람 테러 조직의 지도자들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하겠다는 ICC 검사장의 제안은 끔찍하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독일은 ICC의 ‘독립성을 존중한다’고 밝혔지만, 체포영장 청구 대상에 네타냐후 총리가 포함된 것에 대해선 우려를 나타냈다.
유럽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확고한 지지자인 독일 정부는 이날 성명을 내 ICC의 “독립성과 절차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번 조치가 하마스와 이스라엘 정부 사이의 잘못된 동등성을 만들어낸다고 경고했다.
독일 외무부는 ICC를 “국제사회의 근본적인 성과”라고 부르며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에 대한 ICC 검찰의 체포영장 청구가 정당한지 여부를 예심부에서 먼저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외무부는 또 성명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 지도자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하면서 “동등하다는 부정확한 인상이 생겼다”며 “ICC는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는 이스라엘 관리들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 조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안토니오 타자니 외무장관은 이탈리아 민영방송 레테4(Rete 4) 인터뷰에서 국제형사재판소가 네타냐후 총리를 포함한 이스라엘 관료들과 하마스 고위 관료들을 전쟁 범죄와 가자지구 전쟁 관련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하기로 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자니 장관은 “국민이 합법적으로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부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의 원인인 테러조직과 동일시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반면 프랑스는 이스라엘 총리와 하마스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하려는 ICC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네타냐후를 비호하고 나선 미국과는 상반된 반응이다.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휴전 결의안을 거부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을 앞장서서 비판하고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려는 몇 안 되는 서방 국가 중 하나였다.
프랑스 외무부는 20일 늦게 발표한 성명에서 “이스라엘과 관련해 ICC 검찰이 고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증거를 검토한 후 영장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법원의 전심부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이어 “프랑스는 ICC의 독립성과 모든 상황에서 면죄부(impunity)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프랑스는 또한 국제인도법을 엄격하게 준수할 필요성과 특히 가자지구의 민간인 사상자가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고 인도주의적 접근이 부족하다는 점을 “수개월 동안 경고”해 왔다고 강조했다.
CNN은 “프랑스는 ICC가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하마스의 최고지도자 야히야 신와르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하기로 결정한 후 서방 동맹국들과 결별”한 것이라며 “이번 성명은 프랑스의 입장과 서방 동맹국, 특히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 결정을 ‘터무니없다’고 말한 미국의 입장 사이에 큰 균열이 있음을 나타낸다”고 짚었다.
벨기에는 ICC의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를 지지했다
하자 라비브 벨기에 외무장관은 “가자지구에서 저지른 범죄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최고위급에서 기소돼야 한다”며 “벨기에는 ICC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어 “카림 칸 ICC 검사장에 의해서 하마스와 이스라엘 관리 모두에 대한 체포 영장이 청구된 것은 팔레스타인 상황을 조사하는 데 중요한 단계”라고 덧붙였다.
조셉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ICC 검사가 이스라엘과 하마스 최고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요청한 움직임을 주목했다고 밝혔다.
보렐 대표는 “독립적인 국제 기관인 ICC의 임무는 국제법에 따라 가장 심각한 범죄를 기소하는 것”이라며 “ICC 규정을 비준한 모든 국가는 법원의 결정을 집행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모든 EU 국가는 ICC 회원국이다. 만약 네타냐후 총리 등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면 EU 회원국은 자국 땅에서 영장을 법대로 집행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