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천 칼럼(11)세기의 이혼: 결혼, 이별 그리고 사랑

베토벤은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빈(Wien)에서 열린 소년 피아니스트의 데뷔에 참석하였다. 연주가 끝나자 깊히 감탄한 베토벤은 그를 끌어안고 ‘참 대단한 꼬마 녀석이야’하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한 장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 소년은 다름아닌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였다.

헝가리 출신의 리스트는 첼리스트였던 아버니의 열성에 이끌려 당시 유명한 음악가들을 찾아 스승으로 삼았다. 최초의 교사는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였고, 이어서 살리에리로부터 화성과 작곡도 배웠다.
그리고는 파리로 건너가 활동했는데 그곳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방황하기도 했지만 천재적인 음악 소질로 스무살 즈음 젊은 나이에 이미 베를리오즈, 쇼팽, 파가니니 등과 교류하면서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 후 그는 최고의 피아노 연주가로 인정받아 오늘날까지 ‘피아노의 왕’이라고 불리운다.
높은 인기와 함께 많은 스캔들을 낳던 그는 이 때 7년 연상의 유부녀 마리 백작부인을 만나 사랑의 도피행각을 하며 세 명의 아이도 낳는다. 세 아이 중 둘은 일찍 세상을 등지고 남은 딸이 지휘자 한스 폰 뷜로와 결혼했지만 훗날 그를 떠나 아버지보다도 두 살 많은 바그너와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사랑은 유한한 것인지 파리를 떠들석하게 했던 리스트와 백작부인은 10년도 안돼 결별하게 된다.

그 즈음 리스트는 또 다시 운명의 여인인 우크라이나 귀족 공작부인을 만나게 되고 둘은 결혼하려했지만 문제가 생긴다. 17살에 정략결혼을 한 공작부인이 남편과 별거 중이었는데 신앙 교리에 따라 정식 이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괴로워 하던 리스트는 그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담아 3곡의 가곡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에게 일명 ‘사랑의 꿈(Liebesträume)’으로 잘 알려진 노래다.
이 노래의 원래 제목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혹은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이다. ‘오 사랑하라,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사랑할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그대가 무덤가에서 슬퍼할 시간이 찾아오리라.’
결국 모든 관계가 그렇듯 결혼과 이별 또한 간혹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가오고 이를 극복해야 하는 시험인 거다. 이후 리스트는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결혼식 때 신부는 웨딩마치에 따라 입장하고 신랑과 함께 또한 웨딩마치에 따라 퇴장한다. 이 때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입장할 때 울려 퍼지는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신부 합창곡(Bridal Chorus)’으로 흔히 ‘결혼행진곡’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희망찬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때 연주되는 곡은 멘델스존이 17세에 작곡한 ‘한 여름 밤의 꿈’의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결혼행진곡(Wedding March)’ 인데 보통 ‘축혼행진곡’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 여름밤의 꿈’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다.
이 곡들은 1858년 영국 빅토리아 공주와 프러시아의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서 연주된 이후 오늘날까지 일반 결혼식에서 널리 연주되고 있다. 말하자면 신부는 바그너 음악과 함께 입장하고, 신랑 신부는 멘델스존의 곡과 함께 퇴장하는 셈이다.
헌데 아이러니한 것은 바그너와 멘델스존이 모두 독일 출신이면서 앙숙지간이었다는 점이다. 멘델스존은 돈과 명예, 사랑 그리고 타고난 재능까지 두루 갖춘 유대인 상위 1%의 출신이었다. 요새말로 ‘엄친아’요 ‘금수저’였던 셈이다.
이에 비해 바그너는 전 유럽을 방황하며 굴곡진 흙수저 같은 인생을 보내면서 상류문화계를 장악한 유대인 작곡가들의 벽에 부딪혀 실의에 빠져 귀국하고는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과 민족주의적 성향이 더욱 강해져 반유대주의가 되었다.
가뜩이나 앙숙인 두 거장의 관계를 더욱 심화시킨 이는 히틀러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고 독일을 장악한 히틀러는 12살 때 바그너의 오페라를 처음 보고 눈물을 흘릴 만큼 감동하고 깊이 매료되어 그를 더욱 숭배했다. 해서 바그너의 음악을 독일인의 우수성을 나타내기 위해 우상화하는 한편 유대인인 멘델스존의 음악은 짓밟고 격하했다. 해서 바그너는 훗날 히틀러에 의해 ‘위대한 아리안 작곡가’로 불렸다.
결국 바그너의 민족주의적 사고에서 출발한 ‘게르만 신화’를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현실화하면서 세계를 전쟁의 잿더미 속으로 몰아 넣었던 셈이다. 마치 바그너의 ‘로엔그린’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듯이 말이다.

아무튼 한 쌍의 남녀가 새로운 출발을 꿈꾸는 자리에 물과 기름 같은 사이였던 자신들의 음악이 예식의 시작과 마감을 장식하며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당장에라도 무덤에서 뛰쳐나와 자신들의 곡 연주를 중지시킬 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세기의 결혼으로 유명했던 MS의 빌 게이츠와 멀린다의 이혼 발표가 나오면서 다시금 지구촌은 떠들썩하다. 헌데 이들의 이혼 사유는 단순하지 않고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부부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 때문이다. 흔히들 ‘서로 사이가 나빠져서’라든가 ‘성격이 안 맞아서’라는 것과 사뭇 달라서다.
소설 빙점(氷点)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는 성혼선언문은 ‘부부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되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했다. 그만큼 서로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단 얘기일 게다.
이유야 어쨋든 가장 신성하고 가치있는 결혼예식에 바그너와 멘델스존의 악연에 따른 명암이 드리워지는 건 아닌지 하는 우문(愚問)이 잠깐 든다. 하지만 대립되는 두 음악이 꼭 나쁘게만 느껴지지만은 않는 것은 비록 신부가 비극으로 끝난 바그너의 곡으로 입장하긴 하지만 멘델스존의 행복한 곡으로 신랑 신부가 함께 행진하기 때문이다. 어려움이 결국에는 극복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