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율이 1500원을 넘보며 금융시장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의 금리 인하 기대가 후퇴한 데다, 원화와 동조성이 높은 엔화 가치도 약세를 보이며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AI(인공지능) 거품론 확산으로 위험 선호 심리가 한풀 꺾이며 외국인의 증시 이탈이 가속화된 점도 문제다.
여기에 국내 투자자의 해외 투자 확대, 관세 협상에 따른 대미 투자 등 자금 유출에 대한 구조적 요인도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원화 약세가 가팔라졌다. 다만 고환율을 경제 위기로 해석하기보다는, 한국 외환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시각도 나오고 있다.
2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오전 9시 22분 현재 원·달러는 전일 대비 4.1원 오른 1472.0원에 거래 중이다. 장중 최고가는 1473.9원으로, 미·중 갈등이 격화됐던 올해 4월 초 이후 최고 수준이다. 환율은 10월 초 1400원대에 진입한 이후 가파르게 올라 한 달 반 만에 1500원을 위협하고 있다.
해외투자 확대 ‘구조적 요인’이 초래한 원화 약세
이날 환율 상승에는 AI 거품론에 따른 외국인 자금 이탈과 12월 FOMC(공개시장운영위원회)에서의 금리 인하 지연 전망이 주로 작용했다. 일본 정부의 대규모 경기 부양 추진에 따른 엔화 약세도 주요 요인이다. 엔·달러 환율은 157엔대로 올라 10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최근 고환율 지속의 주된 이유로는 달러 강세보다는 원화 약세가 더 크게 지목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원화의 실질실효환율(REER)은 90.14로, 기준치(100)를 크게 하회하고 있다. 이는 주요 교역국 통화 대비 원화의 구매력이 낮아졌다는 의미다.
주목받는 것은 해외 투자 확대라는 구조적 원인이다. 경상수지 흑자 등 달러 유입과 외국인의 국내 증시 투자에도 불구하고, 해외 증시 투자를 위한 달러 환전 수요가 더 크다는 점이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9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대외금융자산은 2조7976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반면 외국인의 국내 투자 규모를 의미하는 대외금융부채는 1조7414억 달러에 그쳤다. 이에 따라 순대외금융자산은 1조562억 달러로 집계됐다. 해외 투자를 위한 달러 수요가 원화 약세를 초래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해외 투자 열풍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의 매도세가 커진 반면, 국내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에서의 달러 환전 수요를 지속시켜 원화 약세를 유발할 것으로 보인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해외로 나간 자금이 더 많은 만큼, 수급 측면에서 환율을 상승시키는 요인은 4분기에 더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최근 외국인 주식 매도에서 보듯 대외금융부채는 둔화될 가능성이 높고, 해외 투자는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시장에서는 1500원대 환율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과 거주자들의 해외 투자 확대에 따른 달러 수요가 고환율의 원인”이라며 “추세대로라면 1500원대도 가능한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고환율=경제위기’ 일까
최근 고환율 지속에 대한 평가는 다소 나뉜다. 고환율은 기업들의 원재료 및 중간재 수입 비용을 증가시켜 경영 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다. 고환율에 따른 물가 상승은 국민의 소비를 위축시켜 내수를 압박할 수 있다.
통화정책에도 제약을 준다. 성장 반등을 위한 통화정책 완화를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성장세에도 고환율과 고물가가 겹쳐 금리를 낮추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소비자물가의 선행지표인 수입물가는 고환율 영향으로 넉 달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다만 고환율에 따른 수출 확대 기대와 해외투자에 나선 투자자들의 부가 늘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해석된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국내 투자자가 보유한 지분증권은 9260억 달러로 2분기보다 814억 달러 늘었다. 232억 달러를 사들였고, 지분가치와 환율 변동만으로 582억 달러 수익을 거뒀다.
최근 고환율은 경제 구조 변화가 주된 원인이라는 점에서 위기 수준의 충격은 예상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과거 외환 유출입은 기업과 외국인을 중심으로 이뤄져 달러 쏠림 현상이 발생하면 환율이 급등락했지만, 서학개미의 해외 투자는 대규모 자금이 일시에 움직이지 않아 완충 역할을 한다는 평가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해 기자간담회에서 “투자자의 해외투자 자산이 늘며 선진국형 외환시장 구조가 자리 잡았다”며 “과거에는 환율 상승이 대외 부채 상환 부담으로 신용위기를 초래했지만, 지금은 대외 순자산국으로서 환율 변동이 경제위기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정 연구원도 “환율 수준을 위기와 연결 짓는 시각은 이제 교정 필요가 있다”면서 “신용도에 문제가 없다면 지금의 고환율을 부정적인 시선 일변도로 볼게 아니라 긍정적인 부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높아진 환율은 가격 경쟁력에 도움이 된다”면서 “우리나라 통화당국이나 정부가 환율 급등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 대한 개입에 소극적인 것은 인위적인 개입을 주시하는 미국의 눈치도 있지만 이런 효과에 대한 인식도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