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건축의 지형을 바꾸고 LA의 도시 이미지를 재정의한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가 별세했다. 향년 96세.
게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목표 없이 LA에 정착한 십대 소년에서 출발해, 60여 년에 걸친 활동 끝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리 파트너스의 메이건 로이드 비서실장은 게리가 5일 산타모니카 자택에서 짧은 호흡기 질환을 앓은 뒤 세상을 떠났다고 확인했다.
게리는 1970년대부터 LA 건축계에서 존경받았지만, 세계적 명성을 얻은 것은 말년의 눈부신 생산성과 기술적 실험 덕분이었다. 그의 사무소는 복잡한 곡선 형태를 구현하기 위한 디지털 설계기법을 선도했고, 그 결정판이 1997년 개관한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강가를 따라 흐르는 듯한 건물의 곡선미는 건축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고, 침체됐던 건축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사진과 미디어에 완벽히 어울리는 이 디자인은 전 세계 도시들이 ‘빌바오 효과’를 재현하고자 게리 혹은 다른 스타 건축가를 찾는 계기가 됐다.

빌바오 이후 게리는 2003년 오랜 논란 끝에 완공된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통해 “형태만 뛰어나고 실용성은 부족하다”는 비판에 반박했다. 디즈니홀은 외관의 조형미뿐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음향을 갖춘 공연장으로 인정받으며 LA필하모닉의 존재감을 높였다.
2014년 개관한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역시 게리의 후기 걸작으로 꼽힌다. 유리로 된 거대한 ‘돛’이 건물을 감싸는 구조는 그의 특유의 역동성에 세련된 균형미를 더했다.
게리의 작품은 대담한 조형미로 주목받았지만, 건축계에서는 그의 ‘인간적 감수성’도 높이 평가됐다. 빛과 그림자, 공간비율을 세심하게 다루며 사람의 몸과 움직임을 고려한 공간을 만들었다는 평가다. 그의 건축은 마치 문학과 음악, 현대미술처럼 미국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192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프랭크 오언 골드버그로 태어난 그는 1954년 아내의 권유로 성을 ‘게리(Gehry)’로 바꾸었다. USC에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빅터 그루언, 페레이라 & 럭맨 등 당대 주요 사무소에서 경험을 쌓은 뒤 1962년 LA에서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다.
초기에는 절제된 근대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곧 남가주 일상의 혼재된 풍경—창고, 금속 재료, 격자 펜스 같은 도시의 무심한 요소들—에서 영감을 얻어 독창적 건축 언어를 구축했다. 그의 대표적 실험작인 산타모니카 자택 리모델링은 1980년대 건축·미술계에서 큰 화제를 모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됐다.

게리는 오래된 건물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능력도 탁월했다. 리틀도쿄의 MOCA 게펜 컨템포러리, 베를린의 피에르 불레즈 홀, 그리고 2021년 잉글우드의 YOLA 센터는 기존 건물을 재해석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그의 경력의 전환점은 1988년 LA 필하모닉 신공연장 국제 설계경쟁에서 우승하며 디즈니홀 프로젝트를 수주한 일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LA 공공 프로젝트에서 큰 기회를 얻지 못하던 그에게 중요한 인정이었다.
빌바오 구겐하임의 성공은 LA가 지지부진했던 디즈니홀 공사를 재개하도록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2003년 완공되면서 LA 스카이라인의 상징이 되었다.
디즈니홀은 게리가 평생 애정을 품어온 도시 LA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느슨함과 자유로움, 실험정신을 품은 남가주의 문화가 그의 건축 곳곳에 스며 있다.

게리는 아내 베르타 아길레라와 네 자녀를 남겼다.
그의 건축은 세계 곳곳에 남아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사랑했던 도시 LA 곳곳에서 그의 흔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12월 5일은 월트 디즈니의 생일이기도 하다.
<박성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