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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타임스케치] 해적은 바다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미 해병대 군가에서 정일수와 소말리아까지, 바다 위에 비친 국가의 힘과 세계 무역의 역사

2026년 0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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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칼럼니스트

미 해병대 군가(The Marines’ Hymn)의 첫 소절은 ‘몬테수마의 전당에서 트리폴리의 해안까지’로 시작한다. 18세기 말, 북아프리카 연안, 지금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일대에서는 바르바리 해적이 지중해를 넘어 아이슬란드까지 배를 몰고 가 유럽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았다.

이제 막 독립한 미국도 이 해적들에게 통행세를 뜯기다가 결국 1801년부터 군대를 보내 맞섰다. 이것이 ‘바르바리 전쟁’이다. 이때 해병대가 오늘날 리비아의 항구도시인 당시 트리폴리 앞바다까지 진격해 점령한 승리를 기려 미 해병대 군가에 새겨진 한 구절이 바로 ‘트리폴리의 해안까지(To the Shores of Tripoli)’다.

200년도 더 된 해적 소탕전이 오늘날까지 군가 한 줄로 남아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해적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범죄사를 넘어 국가 정체성의 서사에까지 흔적을 남겼음을 보여준다.

해적의 역사는 시대마다 얼굴을 달리했다. 8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바이킹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다. 이들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의 강줄기를 타고 올라가 마을을 약탈하고 정착지까지 건설한 ‘바다의 정복자’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낭만주의 소설의 소재로 자주 쓰이는 카리브해의 해적들이 등장한다. 이른바 ‘해적의 황금시대’. 블랙비어드 같은 인물들이 핏빛의 ‘졸리 로저(Jolly Roger)’ 깃발을 내걸고 무역선을 위협했다.

이런 카리브해의 블랙비어드가 유럽에 있었다면 동양에는 그와 비교가 안 될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적 여왕, 정일수(鄭一嫂)가 있었다. 해적 두목 정일과 결혼한 그녀는 얼마후 남편이 폭풍으로 죽자 부하들을 규합하고 경쟁세력을 통합해 거대한 해적 연맹을 이끌었다.
헌데 그녀의 함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붉은 깃발을 단 함대만으로도 수백 척, 전체 연맹은 1000 척에 가까운 정크선과 4만에서 8만에 이르는 해적을 거느렸다. 카리브의 블랙비어드가 4 척과 300명 정도를 지휘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남중국해를 사실상 지배했다. 상선들은 보호비를 바쳤는데 그녀는 약탈품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강간이나 배신은 가혹하게 처벌하는 등 엄격한 규율로 단순한 무법자 무리가 아니라 질서 있는 사업체의 면모를 보였다.

청나라 조정은 몇 차례나 토벌군을 보냈지만 번번이 패배했고 포르투갈과 영국 함대조차 쉽게 제압하지 못하자 결국 청나라 조정은 토벌을 포기하고 협상으로 우회했다. 그녀는 대다수 부하들의 사면과 자신의 재산 보유를 조건으로 합의를 봐 처형을 피하고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오늘날 소말리아 해적과 일부 묘하게 닮아 있다. 두 사례 모두 감시하는 힘이 다른 곳으로 쏠리며 생긴 공백에서 자라났다. 청나라 조정의 해군력이 다른 반란 진압에 쏠려 있던 틈에 정일수의 함대가 세력을 불렸듯, 지금은 이란발 무력 충돌에 세계 해군의 시선이 호르무즈로 쏠리자 아덴만에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십수 년간 잠잠했던 소말리아 해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도 처음에는 생계를 잃은 어민으로 시작해 외국 어선에 대한 반발로 무장했다가 결국 몸값을 노리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그 결과 지금도 일부 지역 사회는 이들을 범죄자가 아니라 동료로 여긴다고 한다. 정일수의 함대가 가난한 어민들을 흡수하며 연안 마을과 공생 관계를 맺었던 것과 놀랍도록 같은 그림이다.

국가의 공백, 생계의 위기, 그리고 그 틈을 메우는 조직화된 폭력이라는 공식은 200년의 시차를 두고도 놀라울 만큼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해적은 바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는 단지 무대일 뿐, 해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바다를 둘러싼 돈, 권력, 국가의 통제력, 정보, 그리고 육지의 경제적 기반이다.

그러고보면 해적의 역사는 단순한 범죄의 역사가 아니라 국가의 힘과 세계 무역의 역사가 바다 위에 비쳐진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듣는 미 해병대 군가 한 구절, ‘트리폴리의 해안까지(To the Shores of Tripoli)’ 그 짧은 말 속에도 바로 그 역사가 살아 있는 것 같다.

이전 칼럼 [김학천 타임스케치] 신분서갱유  책을 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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