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악보를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고 한다. 그에게 악보는 단순히 작곡가가 적어놓은 음표의 집합이 아니었다. 오래된 악보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표시, 연필 자국, 수정 흔적 같은 것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시대의 음악가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갔는지가 그런 작은 흔적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버지니아대학교에서 진행된 ‘Book Traces 프로젝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는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들을 살펴보며 그 책을 읽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연구팀은 10만 권이 넘는 책을 조사했다. 책의 내용이 아니라 여백의 메모, 밑줄, 낙서, 소유자의 이름과 서명, 편지와 사진, 꽃잎과 머리카락처럼 책 속에 남겨진 ‘사용의 흔적’을 찾아냈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책의 본문만 디지털화한다면 이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낙서나 종이 조각이 아니다. 누군가 이 책을 사랑했거나, 공부했거나, 누군가에게 선물했거나, 어떤 순간에 꽃 한 송이를 끼워두었다는 사실까지 함께 사라진다.
‘Book Traces’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들은 도서관의 목록에는 이미 존재했다. 저자와 제목, 출판연도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 속의 독특한 흔적들은 목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검색으로는 찾아낼 수도 없었다. 말하자면 책은 존재했지만 책의 역사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Project Panama’라는 비밀프로젝트 폭로 보도를 접했다. 인공지능 회사 앤스로픽은 AI 학습을 위해 대량의 책을 구입한 뒤 제본을 잘라 페이지를 분리하고 고속스캔하는 이른바 ‘파괴적 스캔’ 방식을 추진했다. 책의 내용은 디지털 데이터로 남기고 원본은 재활용하는 방식이다.
책을 디지털화하고 지식을 보다 널리 활용하는 일에는 분명 커다란 가치가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존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책 한 권을 완벽하게 스캔했다고 하자. 글자 하나, 그림 하나 빠짐없이 디지털 파일에 들어 있다면 정보라는 측면에서는 책이 완벽하게 보존된 셈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다윈의 책들을 생각해보면 답은 조금 달라진다. 다윈은 자신의 책에 수많은 메모와 밑줄을 남겼고, 책 사이에 쪽지를 끼워두기도 했다. 훗날 연구자들은 그 흔적들을 통해 그가 무엇을 읽었고, 어떤 생각을 발전시켰으며, 어떤 책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정보와 기록은 그래서 다른 것이다. 정보는 우리가 읽어낸 것일뿐이지만 기록은 우리가 아직 읽어내지 못한 것까지 포함한다. 오늘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낙서 한 줄이나 누군가의 서명, 접힌 페이지, 지워진 메모, 손때, 책갈피, 심지어 이름 모를 얼룩 등 우리가 아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흔적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는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Book Traces’가 보여준 것도 바로 그것이다. 기록의 가치는 기록하는 순간 모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훗날 누군가가 그것을 읽어낼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불현듯 ‘새로운 분서갱유’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진시황의 분서와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목적부터 정반대다. 진시황의 분서가 지식을 없애기 위해 책을 태운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지식을 보존하고 활용하기 위한 것이니 같을 수는 없지만 다만 묘한 역설이 있다. 옛날에는 ‘책을 없애면 지식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다면 AI 시대에는 자칫 ‘지식만 추출하면 책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지식만 담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책은 사람도 담고 있다. 누가 읽었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그리고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그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해서 책을 보존한다는 것은 책에 쓰인 문장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흔적까지 함께 간직해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야할 일은 ‘책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보다는 책을 버리면서 무엇을 잃었는가?’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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