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기 미국의 핵탄두는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000배에 달하는 폭발력을 가졌었다. 러시아 핵탄두는 3000배까지 달했다. 이처럼 가공할 파괴력를 보유하면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에 대한 공격을 자제할 것으로 믿었다. 이른바 상호확증파괴(MAD) 이론이다. 핵무기 사용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꿈도 꾸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과 러시아는 파괴력을 크게 줄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보다 훨씬 작은 핵무기의 등장으로 핵사용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낮아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핵경계 강화를 지시하고 러시아군이 핵발전소를 공격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러시아가 소형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가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푸틴이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고 걱정한 끝에 소형 핵무기를 사용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러시아군이 오래도록 전장에서 패배하는 것을 만회하고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래식 전쟁에서 핵전쟁으로 넘어가는 훈련을 해왔다는 점을 주목한다. 세계 최대 핵보유국인 러시아의 군은 다양한 상황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방안을 보유하고 있다. 푸틴이 그 중 한가지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함부르크대학교 및 카네기국제평화재단 핵전문가 울리히 퀸은 “아직은 가능성은 작지만 갈수록 커지고 있다”면서 “러시아에게 전쟁이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고 있으며 서방의 압박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퀸은 푸틴이 우크라이나군이 아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고 했다. 퀸 박사는 2018년 발표한 논문에서 러시아가 핵공격을 경고하는 목적으로 북해 먼 곳에서 핵무기를 폭발시키는 시나리오를 공개한 적이 있다.
퀸 박사는 “이런 말을 하게 돼 너무나 공포스럽지만 그럴 가능성이 커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도 푸틴이 앞으로 핵관련 행보를 늘릴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정보국장 스콧 베리어 소장은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 지난 17일 러시아가 전쟁으로 러시아가 약해지는 경우 “갈수록 핵억제력에 의존해 서방에 경고하고 힘을 과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번주 브뤼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정상들과 회의에서 러시아가 화학무기, 생물무기, 사이버전,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대응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정부에서 국가정보국(DNI) 국장을 역임한 예비역 공군 장성 제임스 클래퍼 주니어는 러시아군이 냉전 종식 이후 혼란을 겪으면서 핵사용의 문턱을 낮췄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러시아군이 이달초 유럽 최대규모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를 공격한 것을 두고 클래퍼 전 국장은 러시아군은 “신경도 안쓴다”고 말했다. “그냥 포격했다. 될 대로 되라는 태도가 드러난 것이다. 우리처럼 핵무기를 특별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푸틴은 지난달 러시아 핵부대에 “특별전투대기”명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핵군대를 장기간 연구해온 파벨 포드빅은 전투대기 명령으로 러시아군의 명령체계가 핵 명령을 받게되는 걸 최우선시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정치인들과 전문가들은 소형 핵무기라도 핵공포 균형을 무너트릴 것이라고 비난한다.
군사분석가들은 푸틴이 파괴력을 줄인 무기 사용 가능성을 조금씩 흘리면서 벼랑끝 전술을 강화시켜 재래식 전쟁에서 상대에게 겁을 주려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브라운대 정치학교수 니나 태넌월드는 “푸틴이 핵 억지력을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는데 사용하고 있다. 핵무기로 서방이 개입하는 걸 막고 있다”고 말했다.
냉전시대보다 파괴력은 작아졌지만 여전히 히로시마에 투하된 폭탄의 절반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가 미국 맨해튼 중심부에 투하될 경우 50만명이 죽거나 다칠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소형 핵무기에 대한 비판은 핵을 금기시하는 것을 약화시켜 위기의 강도를 높인다는 주장이다. 비판자들은 축소된 파괴력으로 인해 핵전쟁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일단 사용되면 갑작스럽게 전면 핵전쟁으로 비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러시아가 소형 핵무기를 경고용으로 발사하고 나토가 소형 핵공격으로 응사하면서 전쟁이 확산하면 몇시간 만에 90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술핵무기 또는 비전략핵무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파괴력을 줄인 핵무기를 통제하는 협정은 없다. 따라서 핵보유국들은 마음대로 이를 배치할 수 있다. 한스 크리스텐슨 미과학자연맹 핵정보프로젝트 책임자는 러시아가 약 2000기의 소형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평가한다. 미국은 핵무기에 대한 반대가 많은 유럽인들의 정서와 나토 동맹국에 핵무기를 배치하는데 따른 정치적 어려움 때문에 유럽에 약 100기 정도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의 핵전쟁 독트린은 “긴장 완화를 위한 긴장고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배할 경우 핵무기를 발사해 공격자를 패퇴시키고 굴복시킨다는 개념이다. 러시아는 이 핵독트린에 따른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1999년 발트해 연안에 고립된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를 나토가 공격하는 상황을 대비한 훈련이 대표적이다. 훈련은 러시아군이 어려움을 겪다가 폴란드와 미국에 핵무기를 발사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함부르크대 퀸 박사는 1990년대의 방어적 훈련이 2000년대 공격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이 과거의 군사력을 복귀하면서다.
이 새로운 공격적 전략에 따라 러시아는 핵무력을 현대화하고 소형핵무기를 개발했다. 서방과 마찬가지로 폭발력을 조절할 수 있는 핵탄두도 보유하고 있다.
신형 핵무기의 핵심이 2005년 실전배치된 이스칸데르-M 미사일이다. 이동발사대에서 약 540km에 달하는 미사일 2기를 발사할 수 있다. 미사일은 재래식 탄두와 핵탄두를 모두 탑재할 수 있다. 러시아는 이 미사일에 히로시마 원폭 파괴력의 3분의 1 수준인 핵탄두를 탑재하고 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전 인공위성 영상에 러시아가 이스칸데르 미사일 대대를 벨라루스와 러시아 동부지역에 배치한 것이 포착됐다. 이들 미사일 중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이 있는 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소련 시절 핵군축 협상에 참여했던 전 러시아 외교관 니콜라이 소코프는 크루즈미사일에도 핵탄두 탑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비행기, 함정, 지상에서 발사돼 낮은 고도로 비행하는 순항미사일은 레이더에 잘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러시아에서 발사해도 “유럽 전역을 공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은 러시아의 소형핵무기를 상쇄하기 위한 무기 개발 노력을 해왔다. 미국은 몇십년 전부터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터키, 네덜란드의 기지에 전투기 탑재용 핵폭탄을 비축해왔다. 퀸박사는 나토가 러시아와 달리 재래식 전쟁에서 핵전쟁으로 전환하는 실전 훈련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0년 오바마 전 대통령은 나토의 무기를 고도의 정밀성을 가진 스마트폭탄으로 바꾸는 한편 히로시마 원자폭탄 파괴력의 2%까지 폭발력을 낮춘 핵무기를 개발키로 했다. 오바마 시절 합참차장을 지낸 제임스 카트라이트 장군은 당시 핵폭탄 폭발력을 낮추면 핵사용 금기 터부가 깨진다고 경고하면서도 그러나 고도로 정밀한 폭탄 덕분에 부수적 피해와 민간인 사상자 발생 위험이 줄었다며 소형 핵무기 사용을 지지했었다. B61 모델 12라는 이름의 이 소형 핵무기는 제조상의 난점과 예산 문제로 내년 이후에 유럽에 배치될 전망이라고 크리스텐슨이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인 2018년 미국은 러시아의 소형 핵무기 개발에 맞서기 위해 히로시마 원폭의 절반 가량의 파괴력을 갖는 미사일 핵탄두 개발을 제안했었다. 이 미사일은 14척의 미 핵잠수함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W76 모델 2라는 이름의 이 핵탄두는 대통령이 핵공격 명령을 쉽게 내리도록 만들 위험이 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트럼프 정부는 러시아가 보복공격 위협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위험을 낮춘다고 반박했다. 이 핵탄두는 2019년 실전 배치됐다.
미국의 새 핵탄두 개발을 지지했던 전직 백악관 및 국방부 출신 프랭클린 밀러는 “모두가 심리전이다. 적이 전장에서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라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한 공포의 심리전”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후보 시절 소형 핵무기 개발 아이디어가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잘못된 아이디어”라고 비판했었다. 그러나 크리스텐슨은 바이든 정부 역시 신형 핵무기를 핵잠수함에서 제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이 핵무기를 사용할 경우 바이든이 어떻게 대응할 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의 핵전쟁 지침은 가장 엄격한 비밀이다. 전문가들은 일반적인 전쟁 계획에서도 총격 한발이 여러 발의 보복 발사로 이어진다면서 이런 에스컬레이션을 막을 만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클래퍼 전 국장조차 푸틴이 핵무기를 발사할 경우 바이든 대통령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 멈출 것이냐? 계속 때려달라고 뺨을 내줄 수도 없는 일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핵무기 발사에 대응해 미국이 핵잠수함에서 1,2개의 핵미사일을 시베리아나 러시아내 군사기지에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나토 핵정책위원회 의장 겸 미 정부 핵담당 당국자였던 밀러는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에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도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군사전략가들은 한발씩 응수 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에게 상황을 추가로 악화시킬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만듬으로써 핵전쟁의 무게를 실감케 해 상황이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라면서 이 역시 오판과 우발성의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비관적 시나리오지만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해 전쟁에 NATO 회원국까지 휘말리는 경우 미국을 포함한 모든 회원국들이 핵공격을 포함한 공동 방어에 나서게 된다.
브라운대 태넌월드박사는 과거의 핵억지력에 따른 방어가 소형 핵무기에 의존한 방어로 바뀔 경우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지 우려했다. 그는 “위기가 발생하면 예전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