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폴 아조우스탈에 숨어 저항하던 우크라이나 군인 256명이 ‘항복’해서 러시아군 캠프로 끌려갔다.
제철소에는 우크라 군인이 몇 백 명 더 남아있지만 러시아군이 마리우폴시의 마지막 미점령지였던 제철소를 완전 함락한 것이며 마리우폴시에 관한 한 우크라군이 러시아군에게 완전히 패한 것이다.
우크라 당국은 러시아 측 숫자보다 많은 부상병 53명 포함 264명의 아조우스탈 수비 군인들이 아조우스탈에서 ‘소개’되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전투 임무를 완수했으며 군통수권자는 이들에게 생명을 보전할 것을 명령했다’고 덧붙였다.
또 이들을 ‘영웅’이라고 칭송했고 몇 시간 뒤에는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 당국 발표에는 제철소에서 소개, 철수했다는 말만 있고 제철소에 나온 이들이 간 곳이 러시아군 캠프이며 버스로 이동한 곳도 러시아군 지역이라고 명시되지 않아 이들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없다.
차마 항복했다고 말 못하고 소개했다, 주둔지를 버리고 나왔다는 완곡어법을 쓴 것이다.
러시아군은 침공 6일째인 3월1일부터 아조프(아조우)해 항구 마리우폴에 대한 시가지 집중포격을 개시했다. 56일째인 4월21일 푸틴 대통령에게 마리우풀 ‘거의 완전’ 함락을 보고하고 마지막 미점령지인 아조우스탈에 대한 돌격진압 안의 재가를 요청했다.
서울시 크기 4분의 1인 160㎢ 전체 시 면적 중 10㎢ 대단지인 아조우스탈만 빼고 모두 손에 넣었으며 포위 포격이 아닌 돌격 진입해서 2000명의 우크라 ‘국수주의’ 강경분자들을 단숨에 분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푸틴은 의외로 돌격할 필요없이 “파리 한 마리도 못 빠져나갈 만큼 철저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2차대전 전승절인 5월9일이 2주일 여 임박한 시기인 데다 푸틴에 대한 전쟁초반 실패 지적이 무성했던 만큼 푸틴이 마리우폴 함락을 선전하기 위해 무자비한 진압전을 택할 것으로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다음날부터 ‘생명유지 조건의 항복’을 제철소 우크라군에게 잇따라 제시했으나 모두 무시되었다. 그러나 결국 푸틴의 철저봉쇄, 고사 작전 명령이 있은 지 25일 만에 우크라 군대 중 가장 강하다는 아조우제철소 수비대가 항복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군인 틈에 섞여 제철소 지하벙커에 대피하고 있던 마리우폴 시민 300명이 러시아의 유엔 개입 허용 덕분에 제철소 경내서 철수해 두 달 만에 제대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소개된 민간인들 상당수가 자기 뜻과 상관없이 러시아로 피난갔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강경 돌격진압 시 발생했을 민간인 살상 피해는 전무했다.
16일의 우크라 군대의 항복도 유혈 충돌없이 이뤄진 셈이다. 25일 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푸틴의 봉쇄 고사작전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다.
인구 45만 명의 마리우폴은 2014년 크름반도 합병 한 달 후 돈바스 지방에 친러시아 주민들이 러시아 도움으로 ‘도네츠크인민공화국’ 및 ‘루한스크인민공화국’으로 분리할 때부터 러시아가 탐냈던 항구다. 마리우폴은 도네츠크주의 남서 모퉁에 위치해 있고 친러시아 분리 무장세력은 이번 전쟁 전에도 몇 번이나 마리우폴 공략에 나섰다.
이를 막아내는 견인차 역할을 한 극우 우크라 국수주의 무장세력 ‘아조프연대’가 러시아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아조우스탈에서 항전한 군인 상당수가 우크라 정규군으로 편입한 이 극우무장대라고 한다.
이들도 장기 포위전에는 손을 들었다. 마리우폴 완전 함락으로 지금까지 러시아군에게 따라붙던 ‘개전 후 지금까지 이렇다할 주요 도시를 하나도 손에 넣지 못했다’는 구절은 사라질 전망이다.
이런 경멸적인 접두 형용 구절이 자취를 감추면서 동시에 푸틴의 전략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뤄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