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가 같은 보수당 하원의원들의 사퇴 압력이 거세지자 결국 취임 45일 만인 20일 사퇴했다.
트러스 총리는 이날 총리 관저 앞 기자회견에서 찰스 3세 국왕에게 집권 보수당 당대표직 사임을 보고했다고 말했다. 규정상 영국 총리는 다수당 당대표가 자동으로 맡게 돼 당대표 사임은 총리직 사퇴로 연결된다.
트러스는 보수당 당대표 경선을 총괄하는 평의원협의회의 그레이엄 브래디 위원장과 기자회견에 앞서 1시간 동안 면담해 사임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총리는 “내주 안에 당대표 선거를 치르기로 브래디 위원장과 합의했다”고 말했다.
9월6일 취임했던 트러스 총리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 서거와 장례식으로 8일~19일을 보낸 뒤 23일 운명적인 감세안을 발표했고 결국 300여 년 영국 의원내각제 사상 최단명 총리가 되고 말았다.
앞서 지난 17일 트러스 총리의 새 재무장관이 된 제러미 헌트 의원이 취임 사흘 만에 전임 재무장관과 트러스 총리가 야심차게 발표했던 ‘감세를 통한 경제성장안’ 대부분을 취소시켰다.
당시 헌트 재무장관은 정부는 시장을 통제할 수 없지만 공공 재정에 관한 명확성을 줄 수 있다면서 감세안 주요 조항의 철회를 발표했다. 정부에 대한 신뢰와 시장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해 출범한 지 얼마 안 되는 새 정부의 핵심 경제안을 번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헌트 장관은 소득세 최저구간 세율을 19%로 내리는 안을 취소해 현행 20%로 무기한 확정시키고 가계의 에너지 부담이 평균 연 2500파운드가 되도록 2년 동안 정부 지원을 통해 실시하려던 에너지비 동결을 내년 4월까지 단 6개월로 축소했다.
이밖에 국민보험료 인하 및 부동산 최초구입자의 취등록세 면제 안 등을 모두 없는 것으로 했다.
즉 트러스 총리와 전임 콰시 콰르텡 장관이 내놓았던 ‘세금는 덜 내고 정부지원은 더 받는’ 언듯 국민들에게 좋은 조치를 의회 법제화 전에 무효로 한 것이다.
9월6일 취임했던 트러스 총리는 콰르텡 재무장관과 함께 9월23일 정식 예산안 구성도 없이 ‘미니 예산안’ 형식으로 경제성장안을 발표했는데 연 450억 파운드의 감세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다른 예산지출 삭감도 없고 세수 보충을 위한 증세도 전혀 없는 감세 예산안은 결국 대규모 신규 국채발행으로 이어지고 이는 9.9%인 인플레를 다시 급격히 올려버릴 것으로 보고 영국 자산 ‘싸게 정리하기’에 나섰다.
파운드화가 1달러 당 1.1달러에서 1.03달러까지 가치 폭락했고 국채 가격 역시 30년 만기물 수익률 5%대 등으로 급락했다. 영국은행이 국채 무기한 매입으로 진정되는 듯 했으나 근본적인 정부 불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IMF 등 국제기구와 미국 정부가 외교적 완곡어법을 넘어 직설적으로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하고 나섰다.
투자 여력이 있는 부자와 기업 감세로 높은 성장률을 유인한다는 ‘낙수이론’을 신봉한 트러스 총리였지만 결국 소득세 최고구간 세율 45% 폐지를 취소했으며 14일 법인세를 25%에서 19%로 내린다는 안도 포기했다.
그러면서 막역지기인 콰르텡 의원을 재무장관 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총리 경선에서 라이벌 리시 수낙 전재무장관을 밀었건 제리미 헌트 전외무장관을 전격 기용했다.
헌트 장관은 17일 연설에서 여러 감세안 취소로 다시 연 320억 파운드의 세금이 걷힐 것이며 에너지비 보조를 대폭 줄이면서 재정 적자가 크게 개선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비 보조를 원안대로 할 경우 연 600억 파운드의 재원이 소요된다.
헌트 장관의 과감한 번복과 취소로 영국 금융시장과 파운드화는 안정을 찾을 수도 있지만 야심찬 미니 예산의 골간이 거의 모두 뜯겨지고 무너져버린 트러스 총리의 정치적 위치는 한층 불안정하고 취약해졌다.
이로부터 사흘 동안 보수당 하원의원 10여 명이 공개적으로 트러스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으며 수십 명이 당대표 신임투표 및 새 경선을 요구하는 서한을 평의원협의회에 보냈다. 19일 하원에서 노동당 제의의 석유프래킹 개발금지법 안 투표를 두고 40여 명이 반대 당론을 무시하는 투표를 했다. 이를 트러스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로 간주하는 분위기 속에서 내각 넘버3인 수엘라 브래이버맨 내무장관이 총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글과 함께 사임했다.
영국 언론에 트러스 총리의 사임이 ‘몇’ 시간 문제라는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가 결국 오전 11시반 사임이 발표되었다.
보수당 당대표 경선은 본래 2단계로 보수당 현역 하원의원 전원이 참여하는 ‘인기’ 투표로 일정수 이상의 후보 추천을 받은 출마 의원들을 최종 2인으로 좁힌 뒤 한 달 이상의 일반당원 우편투표를 치러 최종 결정한다.
전임 보리스 총리는 7월5일 사지드 자비드 보건장관과 리시 수낙 재무장관 등 자신의 내각 주요 장관들이 사퇴를 주장하며 연속 사퇴하자 7월7일 사임을 발표했고 당대표 경선이 곧바로 시작되어 22일 수낙과 당시 외무장관인 트러스 의원이 최종 2인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후 한 달 보름이 넘는 유세와 당원 투표가 뒤따라 9월5일에야 2위인 트러스가 신임 당대표와 후임 총리로 결정되었다.
그 기간이 너무 길었고 359명의 보수당 하원의원들의 선택과 16만 일반 보수당 당원들의 선택에 큰 괴리가 있었다. 트러스는 인기 투표에서 5차례 중 계속 3위에 머물다가 마지막에 2위로 올라왔고 당원 우편투표에서 58%의 득표로 리시를 물리치고 총리가 되었다.
총선 같으면 인구 6800만 명의 영국 총유권자 5100만 명이 650개의 소선구로 의원을 선택하고 다수당을 결정해서 그 다수당의 당대표가 총리가 되는데 트러스는 의원이 아니라 일반 보수당 당원들 지지 덕분에 총리가 된 셈이다.
이에 따라 내주에 있을 신임 보수당 당대표 및 후임 총리 경선은 7월10일~9월5일의 장기 경선이 아닌 초단기 경선 식으로 변칙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보수당보다 하원의원 수가 130명이나 뒤지는 제일야당 노동당은 트러스 몰락 조짐이 보이면서 2024년 12월로 예정된 총선을 앞당겨 즉시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노동당은 보수당보다 20%포인트 이상 앞서고 있다.
보수당은 조기 총선은 응해서는 안 되는 도전으로 보고 신속하게 후임 총리를 선정하려는 태세다. 하원의원들이 트러스 총리의 사퇴를 요구해온 것은 이대로 가면 자신의 소선거구 선거 패배가 불보듯 뻔하기 때문으로 야당의 조기 총선 요구를 막고 트러스가 무참하게 까먹은 보수당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온건하고 경험 많은 중진을 새 총리로 선호할 수 있다.
2019년 총리 경선에서 존슨에게 패했던 제러미 헌트 현 재무장관은 장관 취임 때부터 후임 총리의사가 없다고 명확히 말했다. 리시 수낙 전재무장관, 벤 월러스 국방장관, 페리 모돈트 다수당 원내총무 및 마이클 고브 전 주택장관 등의 중진이 거론되고 있으나 이틀 전 당원 대상 여론조사에서는 같은당 하원의원들과 자신의 내각 장관들에게 쫓겨난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1위에 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