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백 년 전 영국 시골 마을 한복판의 공동 목초지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다들 적당히 쓰자.’ 그런데 한 농부가 생각했다. ‘내가 소 한 마리 더 풀어도 목초지가 망하진 않겠지.’ 헌데 옆 농부도, 그 다음 농부도 같은 생각을 했다. 결국 목초지는 황폐해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만의 생각이 재앙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현상을 두고 1968년 생물학자 개릿 하딘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이름 지었다. 자발적 절제는 믿을 수 없으며, 공유 자원을 지키려면 강제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시험의 신뢰’ 역시 하나의 공유지라는 점이다. 같은 개념으로 프린스턴 대학은 1893년 부터 인간의 양심에 기댄 제도를 실시했다. 이른바 ‘아너 코드(Honor Code)’ ‘명예규범’이었다. 시험 시간이 되면 교수는 문제지를 나눠주고 조용히 강의실을 나갔다. 학생들만 남았다. 커닝은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남겨진 학생들은 시험지 하단에 직접 서약문구를 적었다. ‘나는 이 시험 중 아너 코드를 위반하지 않았음을 명예를 걸고 서약한다.’ 감시 없이도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 그리고 타인의 부정행위를 공동체를 위해 신고하는 것. 이것이 프린스턴이 133년간 길러내고자 한 인간상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 엘리트 교육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헌데 2022년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ChatGPT의 등장으로 커닝의 문턱이 급격히 낮아졌고, ‘AI 사용이 정말 커닝인가?’라는 도덕적 모호함까지 더해졌다. 안 하는 학생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공유 목초지에 소 한 마리씩 더 풀어놓던 농부들처럼.

인간 사회에서 자율 규범은 생각보다 매우 섬세한 균형 위에 존재한다. ‘대부분이 규칙을 지킨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사람은 손해를 감수하며 정직해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다들 몰래 속이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는 순간, 정직한 사람이 오히려 바보가 된다.
2025년 졸업반 설문은 그 균형이 이미 무너졌음을 보여줬다. 응답자의 30%가 부정행위를 인정했고, 45%는 동료의 부정행위를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자가 보복과 따돌림에 노출되는 SNS시대, 신고하는 학생이 오히려 피해자가 되는 순간, 아너 코드는 무용지물이 됐다.
이것은 단순히 규칙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더 이상 ‘명예’를 사회적 가치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결국 프린스턴 교수위원회는 이 문화적 자긍심을 페지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133년의 전통에 종지부를 찍고 오는 7월부터 모든 대면 시험에 감독관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로써 프린스턴이 잃은 것은 무감독 시험 제도가 아니라 ‘우리는 서로를 믿는다’는 선언을 잃은 것이다.
여기서 공유지의 비극을 제시한 하딘과는 또 다른 목소리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노벨경제학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수십 년간 전 세계 공동체를 연구하며 증명했다. 스위스 알프스 농부들, 일본 어촌, 스페인 관개 조합은 강제 없이도 수백 년간 공유 자원을 지켜왔다는 것을 말이다.
그 비결은 무엇이엇을까? 서로를 이웃으로 여기는 신뢰의 문화, 그리고 구성원 스스로 만든 규칙. 양심만으로도 부족하고, 강제만으로도 부족하다. 신뢰가 살아있는 공동체, 그것이 핵심이라고 그녀는 결론 지었다.
공동체 감각이 무너진 자리에 AI 기술이 파고든 오늘, 감독관이 돌아온 그 강의실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믿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감시가 필요한 타인들의 집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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