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6년 7월 4일, 미국 독립 50주년 기념일 아침. 91세의 존 애덤스가 매사추세츠 자택 침대에 누워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살아있는데…’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렇게 제2대 대통령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애덤스가 그 이름을 부르던 바로 그 시각,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에서 제퍼슨은 이미 몇 시간 전 세상을 떠난 뒤였다. 건국의 두 아버지는 같은 날, 독립기념일에, 나란히 눈을 감았다. 정확히 독립선언 50년 후에.
역사는 때로 이렇게 지나치게 극적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감동적인 것은 날짜의 우연 때문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이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애덤스와 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함께 만든 동지였다. 그러나 건국 이후 두 사람의 길이 갈렸다. 애덤스는 강한 중앙정부를 원했고, 제퍼슨은 결사반대했다.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오늘날로 치면 공화당과 민주당만큼이나 다른 세계관이었다.
아이러니는 당시 헌법 구조에서 터졌다. 대선에서 1위가 대통령, 2위가 자동으로 부통령이 되는 규정 탓에, 대통령 애덤스와 부통령 제퍼슨이라는 희한한 조합이 탄생했다. 정치적으로 정반대인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 4년을 버텨야 했다. 그러니 갈등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1800년 대선에서 제퍼슨이 애덤스를 꺾고 3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애덤스는 그의 취임식에도 나타나지 않고 새벽에 짐을 싸 고향으로 가버렸다. 미국 역사상 전임 대통령이 후임자 취임식에 불참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리고 이 불편한 동거의 경험은 결국 헌법을 바꾸게 했다. 1804년 수정헌법 12조가 통과되어 대통령과 부통령을 별도로 투표하되, 같은 당의 러닝메이트로 함께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애덤스였다. 1812년 새해 첫날, 그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명분은 소박했다. 그저 오래된 벗에게 새해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는 것. 그러자 제퍼슨도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8통이나 이어졌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독립혁명을 회고했고, 철학을 논했으며 서로의 건강을 걱정했다. 서로 다른 신념에 대해서는 다투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역사가 판단한 영역이었을뿐 두 사람이 나눈 것은 논쟁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내면서 공유할 수 있었던 그 어떤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편지가 오간 뒤 두 사람은 같은 날 눈을 감았다.
제퍼슨은 죽기 전 스스로 묘비명을 정했다.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 종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 잠들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이었다는 말은 한 줄도 없었다. 권력이 아니라, 자신이 쓴 문장과 세운 학교로 기억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문장 중 하나가 바로 독립선언서의 핵심이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앙숙과 화해하고, 권력보다는 문장을 택하고, 라이벌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둔 두 사람, 그들이 살았던 방식이 어쩌면 미국 민주주의가 250년을 버텨온 진짜 이유였는지 모른다.
2026년, 미국은 독립 250주년을 맞았다. 오늘의 미국은 어떤가. 같은 나라 안에서 서로 다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현실을 살면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애덤스와 제퍼슨도 세계관이 달랐고, 권력을 두고 다퉜고, 오랫동안 등을 돌렸다. 허나 먼저 손을 내밀었고 끝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이 250주년을 맞는 오늘의 어두운 그늘이다.
250년 전 독립을 선언한 나라는 완성된 민주주의를 내세운 것이 아니었다. 갈등을 품고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었다. 애덤스가 먼저 편지를 쓴 것처럼 그 약속은 언제나 누군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에서 시작된다. 해서 그 편지 한 통이, 그 문장 하나가 250년을 버텨 왔음이다. Happy Fourth of Ju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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