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병원들이 보험 가입 환자들에게도 진료나 수술을 받기 전에 수백∼수천 달러의 치료비를 먼저 내도록 요구하는 사례가 확산되고 있다.
건강보험에 가입해 매달 보험료를 내고도 정작 병원 문턱에서는 거액의 공제액과 본인부담금을 먼저 내야 하는 이른바 ‘치료비 선납’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13일 KFF Health News에 따르면 과거에는 병원이 환자를 치료한 뒤 보험사에 비용을 청구하고, 보험 처리 이후 확정된 환자 부담금을 청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병원과 의료기관들이 예상되는 환자 부담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진료 전에 ‘선납금(pre-service deposit)’ 형태로 요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는 다른 지역에 비해 병원이 환자로부터 사전에 거둬들이는 금액이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으로 지목됐다.
병원 수익관리업체 코디악 솔루션스(Kodiak Solutions)에 따르면 병원들은 현재 보험사가 지급하고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환자 부담액 가운데 평균 약 25%를 치료 전에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보험사가 MRI 등 영상검사 비용으로 1,000달러를 지급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병원이 환자에게 약 250달러를 먼저 요구하는 식이다. 과거에는 같은 상황에서 약 150달러 수준이었다.
문제는 건강보험의 공제액(deductible) 자체가 크게 뛰고 있다는 점이다.
KFF 분석에 따르면 오바마케어(ACA) 마켓플레이스 보험의 1인당 평균 공제액은 지난해 2,759달러에서 올해 3,786달러로 1,027달러, 무려 37% 급증했다. 2014년 ACA 마켓플레이스가 출범한 이후 가장 큰 폭의 상승이다.
고용주 제공 가족 건강보험의 평균 공제액 역시 1인당 3,762달러에 달한다.
결국 보험에 가입해 있더라도 실제 보험 혜택이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전에 환자가 수천 달러를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셈이다.
의료재정관리협회(HFMA)의 리처드 건들링 수석부회장은 이런 상황에 대해 환자들이 사실상 “스스로 보험을 드는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일부 대형 의료기관은 이미 선납 정책을 공식화하고 있다.
존스홉킨스 메디슨은 비응급 진료에 대해 환자가 부담해야 할 금액을 의료서비스 제공 전에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메이요클리닉도 비계약 보험 등 여러 상황에서 진료 전 보증금을 요구하고 있다.
선납금 규모가 예상 진료비와 크게 차이 나는 사례도 있다.
덴버에 거주하는 토머스 조다니는 뇌 영상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된 뒤 심한 두통 치료를 위해 피닉스의 메이요클리닉을 찾았다.
그는 예약 당시 자신의 보험이 적용된다는 안내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병원에 도착한 뒤 5,000달러의 선납금을 요구받았다. 이를 거부하자 진료가 취소됐다.
그런데 이후 확인된 보험사의 예상 환자 부담액은 565달러였다.
조다니는 결국 소송을 제기했고 2025년 중재 결정에서 메이요 측이 보험 네트워크 문제를 사전에 제대로 알리지 않아 애리조나 소비자보호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돼 경제적 손실과 변호사 비용 등 4만7,500달러를 인정받았다.
병원들이 선납금을 확대하는 이유는 환자에게 청구해야 할 돈을 치료 후 받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디악이 미 전역 2,300여개 병원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병원들이 선납금 징수를 늘리고 있는데도 회수하지 못하는 환자 부담금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보험 상품의 공제액과 공동보험 부담이 커지면서 환자가 직접 책임져야 하는 금액은 늘어난 반면 이를 실제로 낼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응급환자는 상황이 다르다.
메디케어에 참여하는 병원 응급실은 연방법에 따라 환자가 돈을 먼저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응급환자에 대한 검사와 안정화 조치를 거부할 수 없다.
반면 예정된 비응급 진료나 수술, 특히 보험 네트워크 밖 의료기관을 이용할 경우 선납금에 대한 소비자 보호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전문가들은 선납금을 요구받을 경우 병원이 제시한 금액을 그대로 지불하기에 앞서 보험사에 직접 연락해 남아 있는 공제액과 예상 본인부담금을 확인하고, 병원 측에 선납금 산정 내역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또 선납액이 실제 확정된 환자 부담액보다 많을 경우 환불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결국 공제액 상승과 병원의 선납 요구가 동시에 확산되면서 미국 의료보험은 ‘보험에 가입했지만 치료받기 위해 다시 목돈을 준비해야 하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상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