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전 쇼펜하우어는 짧은 이야기 하나를 세상에 내놓은 적이 있다. 추운 날 고슴도치들이 온기를 나누려 모여들었지만 가까울수록 가시에 서로 찔린다. 해서 서로 물러나면 이번엔 한기가 뼈를 파고든다.
이런 수없이 반복된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마침내 찌르지도 춥지도 않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내었다. 어느 정도 냉기를 감수하고 온기를 나누기 위한 불가피한 타협이었던 것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이 적정거리를 ‘예의’라 불렀다. 후에 이 우화는 ‘고슴도치 딜렘마’로 널리 알려졌다. 동양의 오래된 처세술인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도 같은 진실을 담고 있다. 너무 가까이 해서도, 너무 멀리 해서도 안 된다는 것. 동서양이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이렇듯 관계란 그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조율되는 것이며, 그 과정이 곧 삶인 것이다.
500여 년 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였지만 동시에 해부학자, 건축가, 음악가, 수학자였다. 그의 잡다한 지식들은 한 인격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새로운 상상력이 됐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당시 문명사를 바꾼 거인들은 ‘제너널리스트’ 융합형 인물들이었다. 오늘날 전문인을 일컫는 ‘스페셜리스트’에 상대되는 말이다. 오늘날 AI 또한 의학, 법학, 철학, 물리학을 동시에 넘나드는 ‘AI 제너럴리스트’로 불린다. 얼핏 겉으로는 르네상스의 부활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빈치에게는 모든 지식을 통섭하는 자아가 있었지만 AI의 지식은 넓기만 할뿐 그 안에 마찰과 번민이 없다. 말하자면 상처 없는 박학다식. 긴장 없는 제너럴리즘일 뿐인 거다.
지난 주 일본 도쿄 한 가정집에서 두 자매가 싸우자 아버지는 이를 말리다 큰딸의 몸을 밀쳐 넘어뜨렸다.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 일본 프로야구 최고 명문 구단의 사령탑인 아베 신노스케였다. 쓰러진 큰딸은 챗GPT에 물었다. ‘아버지로부터 폭행당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AI는 아동상담소 연락처를 안내했다. 딸은 그 번호로 전화했고 경찰이 출동했다. 아버지가 체포되자 딸은 크게 당황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 짧은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딸은 경찰을 원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찌르지 않는 고슴도치를 찾았다. AI가 가까이 있었다. 판단하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24시간 곁에 있는 존재로. 이 사건으로 아베 감독은 ‘전통 있는 요미우리 감독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눈물을 흘렸고 사퇴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아이러니는, 딸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침 바티칸에서 레오 14세 교황이 즉위 후 첫 회칙 ‘마그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간성)’를 발표하고 선언했다. ‘AI는 이제 무장해제돼야 하며, 그것을 지배, 배제, 죽음의 도구로 만드는 논리에서 해방돼야 한다.’ 기술 자체를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라, AI가 인간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제거하려 할 때 우리가 잃게 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가톨릭 전통에서 고통은 결함이 아니고 관계의 마찰 또한 낭비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이다. 고슴도치들이 찾아낸 적당한 거리는 수없이 찔린 끝에 얻은 지혜였다. 상처를 감수하면서도 조율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인격을 만들고, 관계를 만들고, 사회적 감각을 키우게 한다. 헌데 AI는 그 과정을 건너뛰게 해준다. 찌르지 않는 고슴도치. 판단하지 않는 조언자.
상처 없이 따뜻한 존재. 고슴도치 딜렘마를 기술적으로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허나 마찰 없이 얻은 온기는 진짜 온기가 아니요, 마찰 없이 위로만 제공하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회피일 뿐일 게다. 마찬가지로 진짜 제너럴리스트는 지식의 폭이 아니라, 지식들 사이의 내적 긴장을 견디는 능력에서 나온다. 어쩌면 교황이 말하는 ‘위대한 인간성’도 이것이 아닐는지. 찌르고 찔리면서도 곁에 있으려는 의지. 불완전한 언어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것이 AI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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