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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타임 스케치] 발트의 기상: 호르무즈 가는 리투아니아

2026년 0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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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칼럼니스트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은 시작될 때, 독주 바이올린이 오케스트라의 도움 없이 홀로 등장한다. 아득한 침묵 위로 솟구치는 한 줄기 선율, 그것은 애원이 아니라 일종의 선언같이 엄숙하다.

특히 20세기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가운데 하나인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가 이 협주곡을 연주할 때는 그 음색이 유독 서늘하면서도 단호한 것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1901년 한때 ‘북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도시이자,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국의 역사는 반전의 반전 연속이었다. 15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뻗어 있던 유럽 최대의 나라였다. 큰 번영을 누렸지만 이후 러시아 제국과 나치 독일의 지배를 겪다가 1795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이래 123년간 국가로서 존재하지 못해 오랫동안 지도 위에서 지워졌었다.

그러다가 1918년 독립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다시 합병됐다. 그러나 민족 정체성과 독립 의식이 분명해 소련 체제가 흔들리게 되자 발트 3국의 시민 약 200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탈린에서 빌뉴스까지 약 700Km를 인간 띠를 만들어 저항했다.

‘발트의 길(Baltic Way)’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총도 없이, 연설도 없이, 단지 노래와 침묵과 맞잡은 손으로 제국에 저항한 역사상 가장 시적인 시위였다. 시벨리우스가 핀란드 독립 정신을 바이올린 협주곡에 담았던 것 처럼 그 인간 띠는 소리 없이 울리는 협주곡이었던 것이다.

Baltic Way section at the 10th kilometer of Cēsis-Valmiera road[위키미디어커먼스]
마침내 리투아니아는 1990년 소련 붕괴 직전, 발트 3국 중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소련이 탱크를 몰고 군사압박을 가해왔지만 시민들이 맨몸으로 막아서며 독립을 쟁취해 세계지도에 그 이름을 다시 올리게 됐다. 이후 친서방 노선을 적극적으로 걸으며 2004년 유럽연합(EU)과 나토(NATO)에 가입했다.

수도 빌뉴스에서 서쪽으로 300Km 정도 가면 발트해 연안에 칼리닌그라드가 있다. 지금은 발트 3국 사이에 껴있는 러시아 땅이지만, 임마누엘 칸트가 태어나고 평생을 살다 죽은 곳이다. 단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현대 철학 전체를 바꿔 놓은 그는 이곳에서 물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오늘의 리투아니아도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거다.

소국의 외교는 원칙과 실리 사이의 외줄타기다. 한반도 1/3 정도 면적을 가진 인구 280만의 리투아니아는 대만과 공식 관계를 맺어 중국의 격렬한 보복을 자초했고, 러시아 제재에서 가장 앞장선 나라 중 하나였는데 이제 호르무즈에 깃발을 꽂겠다고 나서고 있다.

지난 11일 리투아니아 국가방위위원회는 미국 주도의 호르무즈 해협 국제 해상 안보 작전에 최대 40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안을 승인하고 의회에 비준을 요청했다. 나토 동맹국 중 이 작전 파병을 공식화한 것은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국의 비협조를 공개 비판하며 유럽 주둔 미군 재배치를 거론하는 상황에서, 리투아니아의 선택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두려워하면 안 되기 때문에 내린 결단일게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에 가깝다. 이는 ‘모든 나라가 이렇게 행동했을 때

세계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가’를 의미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묻고 내린 결론이라는 말이다.

하이페츠가 시벨리우스 협주곡 피날레를 연주할 때, 활은 거의 폭력적인 속도로 현을 긁어댄다. 빠르고 거칠고 눈부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다. 작은 활이 굵은 현을 긋는데 소리가 작지 않다. 발트해 소국 또한 페르시아만에 보내는 40명, 숫자는 적지만 그 무게는 결코 작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이전 칼럼 [김학천 타임 스케치] 5월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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