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 간 결제 시장이 암호화폐로 재편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세계 최대은행과 핀테크 기업들이 법정화폐와 가상자산이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발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10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최고경영자(CEO)인 브라이언 모이니한은 지난달 워싱턴 경제클럽 행사에서 “만약 (스테이블코인이) 합법화된다면, 우리도 그 사업에 뛰어들 것”이라고 언급했다. 스탠다드차타드도 지난달 홍콩의 새로운 스테이블코인 규제에 따라 홍콩 달러 기반의 토큰을 출시하는 벤처를 주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는 지난달 11억 달러(약 1조 6007억원)를 들여 스테이블코인 플랫폼 브리지(Bridge)를 인수하며 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을 단행했다. 스트라이프의 공동 창립자이자 사장인 존 콜리슨은 “스테이블코인과 최신 블록체인 기술은 결제에 매우 유용하며, 결제는 우리의 핵심 사업”이라고 말했다. 스트라이프는 지난해 1조 4000억 달러 규모의 결제를 처리한 기업이다.
페이팔도 기존의 PYUSD(미국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를 올해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특히 해외 공급업체에 비용을 지급하는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 수요가 높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핀테크 업체 클라나(Klarna)의 CEO 세바스찬 시에미아트코프스키는 엑스(X·전 트위터)에 “이제 포기하겠다. 클라나도 암호화폐를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곧 더 많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암호화폐를 수용한 대형 핀테크 기업”이라고 남기기도 했다.
이런 대형 은행들과 핀테크 기업들의 행보는 전 세계 규제 기관들이 스테이블코인을 금융 시스템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 의회에서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는 법안을 논의 중이며, 이로 인해 은행·기업·소비자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보다 신뢰할 수 있게 됐다고 FT는 설명했다. 분위기는 6년 전 메타의 스테이블코인 리브라(Libra)에 대한 규제당국의 적대감 이후 변화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암호화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긍정적 분위기는 더욱 가속화됐다고도 부연했다.
또 유럽연합(EU)은 올해 초 스테이블코인 사업자에 대한 규제를 도입했으며, 영국 금융감독청(FCA)도 올해 시장의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라고 한다.
핀테크 컨설팅 회사 ’11:FS’의 공동 창립자인 사이먼 테일러는 “스테이블코인 골드러시에서 사람들이 삽을 뜨고 있다”면서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투자자들의 두려운 마음이 이런 움직임을 촉진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나의 요인은 실제 거래량 증가”라면서 “창업자들은 앞으로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마련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싶어한다.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한 결과다”라고 덧붙였다.
다만 신규 진입자들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결제기술업체 비자의 데이터에 따르면 페이팔의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은 이달 1억6300만 달러에 불과한 반면, 테더는 같은 기간 1310억 달러 이상의 거래를 기록했다. 지난달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한 글로벌 거래는 1억2200만 건에 불과했으나, 비자의 신용카드 네트워크에서는 하루 평균 8억2900만 건의 결제가 이뤄졌다.
벤처캐피털 인덱스벤처스의 마틴 미뇨는 “스테이블코인은 인프라가 열악하고 유동성이 부족하며 환율 리스크가 큰 시장에서 매력적이지만, 서구 시장에서는 그 필요성이 그리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분석가들은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수십 개의 코인을 유지할 수 없으며, 결국 발행사의 신뢰도가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테일러는 “스테이블코인은 현금이 아니라 현금 대체물이며, 발행사의 신용 리스크와 운영 리스크를 반영한다”며 “결국 스테이블코인의 브랜드는 발행사가 누구인지를 나타낸다. 즉 발행사가 특정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 스테이블코인의 신용 리스크가 달라진다. 이는 달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주로 암호화폐 간 거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돼 왔는데, 신흥 시장에서는 은행 시스템을 우회하는 결제 수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원자재, 농업, 해운 산업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스테이블코인은 주권 통화(대부분 미국 달러)에 연동된 암호화폐로, 기업과 소비자들은 이를 통해 은행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도 저렴하고 즉각적으로 경화(hard currency·언제든지 금이나 다른 화폐로 바꿀 수 있는 화폐)에 접근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2100억 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돼 있으며, 엘살바도르에 본사를 둔 테더가 약 1420억 달러, 미국의 서클이 570억 달러를 발행했다. 이들은 각각 USDT와 USDC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다.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X는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에서 스타링크 위성을 판매한 수익을 본국으로 송금할 때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며, 인공지능 기업 스케일AI는 해외 계약직 직원들에게 디지털 토큰으로 급여를 지급하는 옵션을 제공하고 있다.
비자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의 거래량은 지난달 7100억 달러를 기록해 전년 동기 5210억 달러에 비해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