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와 미국의 무역협상이 결렬됐다. 미국은 캐나다산 제품에 50% 관세를 매겼고, 캐나다는 맞대응을 예고했다. 헌데 흥미로운 것은 그 이유가 흔한 관세 싸움에서와 달리 프랑스어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캐나다의 ‘퀘백의 법’이 ‘차별적 무역장벽’이라 지목했다. 이 법은 퀘벡에서 판매되는 제품 라벨에는 프랑스어를 병기해야하고 넷플릭스나 스포티파이 같은 미디어 서비스도 프랑스어 콘텐츠를 우선 제공하라’고 요구하는 법이다.
이를 두고 미국 협상 책임자는 ‘웃기고 가짜 같은 이야기’라고 깎아내렸다. 그러자 캐나다 총리 마크 카니가 발끈했다. ‘미국인들에겐 프랑스어가 그저 거슬리는 것이겠지만, 여기서는 권리다’라며 이 말을 퀘벡에서 굳이 프랑스어로 반격한 것이다.
한 나라의 무역 협상이 언어 때문에 깨지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캐나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수 있다. 이건 30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의 최신 라운드일 뿐이다.
이야기는 1759년 퀘벡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파리 조약으로 캐나다 전체를 영국에 넘겨 주게 되었다. 더 참혹한 사건은 그보다 앞서 있었다. 1755년, 영국은 노바스코샤에 살던 프랑스계 농민 ‘아카디언(Acadiens)”들을 배에 태워 강제로 내보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다른 배에 실려 뉴잉글랜드와 카리브해로 흩어졌고, 수천 명이 항해 중 죽었다. 롱펠로(HW Longfellow)는 그의 시 ‘에반젤린(Evangeline, A Tale of Acadie)’에서 이 비극을 노래했다. 흩어진 아카디언 일부는 루이지애나에 정착했고 그 후손이 오늘날의 케이준(Cajun- ‘Acadien’의 변형)문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정복자 영국은 퀘백에서 뜻밖의 선택을 했다. 1774년 퀘벡법을 만들어 프랑스계 주민의 가톨릭 신앙과 프랑스어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13개 식민지에서 반란 기운이 일던 시기였던 터라 퀘벡 주민들을 반란군에 합류시키지 않으려는 회유책이었다. 아카디언은 쫓겨났지만 퀘벡의 프랑스계는 오히려 정복자 아래서 언어를 지킬 제도적 기반을 얻은 셈이었다.
얼마 후 프랑스에게 이 패배를 되갚을 기회가 찾아왔다. 1778년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해 요크타운 전투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원으로 프랑스 왕실 재정은 파탄나고 훗날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됐다. 그리고 1803년,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 지역대(Louisiana Territory)를 불과 1,50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아넘겼다. 이로써 프랑스는 북미 대륙 본토에서 완전히 퇴장하게 됐다.
비록 나라는 사라졌지만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캐나다 안에서 영어권에 둘러싸인 소수 언어 지역으로 남은 퀘벡은1960년대 들어 프랑스어를 지키는 강력한 법들을 만들었다. 그 결과물이 지금 미국과 갈등을 빚는 101호 법, 96호 법이다.
이번 갈등이 유독 뜨거운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퀘벡은 몇 주 앞으로 다가온 주 선거를 앞두고 있고,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정당의 지지율이 치솟고 있다. 퀘벡은 이미 두 차례 독립 주민투표를 치렀으나 조그만 차이로 독립이 부결된 바 있다. 퀘벡 주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문화, 우리의 언어는 정체성의 핵심이다. 관세로 위협받더라도 우리는 우리 모습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1759년 프랑스는 전쟁에서 졌고, 1755년 아카디언은 배에 실려 흩어졌으며, 1803년 프랑스는 대륙에서 완전히 퇴장했다. 세 번 모두 프랑스어가 패배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올해 들어 캐나다 총리는 바로 그 프랑스어를 지키겠다며 미국과의 협상을 걷어찬 것이다. 지도 위에서 프랑스라는 나라는 사라졌지만 프랑스어는 살아남아 이제는 미국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전쟁은 대포로 이미 끝났으면서도 언어는 그 후로 300년을 이어 더 싸우고 있는 형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