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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타임스케치] 엔드핀의 철학… 소리 없이 지탱하는 것

엘가와 재클린 뒤 프레, 그리고 우리 삶을 버티게 하는 단 하나의 ‘지지점’

2026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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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천 칼럼니스트

첼로를 연주할 때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무척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다. 첼로 맨 아래에서 바닥을 향해 뻗어 내린 가느다란 금속 막대기다. 첼로의 키를 조절할 수 있고, 악기의 기울기를 결정하며, 연주자가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첼로 전체를 지탱해 주는 엔드핀(endpin)이다. 엔드핀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선율도, 화음도, 울림도 그것에서 나오지 않지만 이것 없이는 아무것도 연주되지 않는다.

엔드핀의 탄생은 어떤 특별한 의지에서가 아니라 불룩한 배에서 비롯됐다. 19세기 벨기에의 첼리스트 대가 세르베(Servais)는 나이 들수록 불어난 몸집 때문에 전통적인 자세로 연주하기가 어려워지자 악기 아래에 금속 막대기를 달게 되었다.
그러자 파리 음악원의 프랑숨(Franchomme)은 평생 엔드핀을 거부하며 학생들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후 음악원이 엔드핀 사용을 공식 허가한 해는 1884년인데 공교롭게도 프랑숨이 사망한 바로 그 해였다. 반대하던 자가 사라진 뒤에 세상이 바뀐 셈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엔드핀의 더 큰 공적은 여성들에게 첼로를 돌려줬다는 데 있다. 넓은 치마와 코르셋으로 묶인 19세기 여성들에게 첼로를 두 다리 사이에 끼우는 자세는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허나 엔드핀이 보급되면서 첼로가 비로소 모두의 것이 됐다. 쇠 막대기 하나가 여성 무대의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1918년,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는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종이와 연필을 달라 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첼로 협주곡 e단조의 첫 주제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듬해 초연은 완전한 재앙이었다. 공동 지휘자가 리허설 시간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준비 없이 무대에 선 곡은 처참한 평가를 받았다. 엘가는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이 곡 옆에 이렇게 적었다. ‘FINIS R.I.P. – 내 음악은 죽었다. 고이 잠들라.’

그렇게 헤서 그의 음악이 침묵 속으로 들어간 지 45년 지난 1962년 3월 21일, 봄의 첫날.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의 무대에 17세 소녀가 첼로를 들고 나왔다. 재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é), 그녀가 연주한 곡이 바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엘가의 협주곡이었다. 겨울 내내 죽은 듯 하던 가지에서 봄에 새싻이 솓아나듯 그의 곡이 그녀에 의해 피어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가디언의 비평가 네빌 카더스는 이렇게 썼다. ‘봄의 첫날, 이 자리에 있던 이들은 이른 개화(開花)를 목격했다.’ 그리고 3년 후 녹음을 들은 로스트로포비치는 ‘내 제자가 나보다 훨씬 잘 연주했다’며 자신의 레퍼토리에서 이 곡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10년 후, 그녀의 손가락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발성 경화증이었다. 1973년 2월 8일, 주빈 메타와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엘가 협주곡이 그녀의 마지막 런던 무대가 됐다. 당시 그녀의 나이 28세. 그리고 42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불과 11년의 연주 인생이었다.

돌아보면, 엘가와 재클린의 이야기는 엔드핀 이야기와 닮아 있다. 엘가의 협주곡은 초연의 굴욕 속에 쓰러졌다가, 1962년 봄의 첫날, 재클린이 꽂아준 엔드핀으로 잊혀졌던 작품에서 세계적인 명작으로 재탄생되었다.
재클린 역시 여성 첼리스트들의 해방 위에 서서 온몸으로 음악과 싸웠다. 그녀의 연주는 기술을 넘어선 삶 자체의 울림이었고, 사랑과 고통이 뒤섞인 어떤 진실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열정적인 활놀림과 깊은 음색을 기억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녀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지탱’하고 있었는가였다.
음악은 여전히 그녀 안에 있었지만 그것을 지탱해 줄 ‘엔드핀’이 바닥에서 들리던 날, 연주는 끝났다. 두 사람 모두 마치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처럼 짧고

갑작스럽게 세상이 허락한 시간 안에서만 연주할 수 있었던 거였다.
생각해보면 우리 각자의 삶에도, 말없이 바닥을 짚고 있는 엔드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안정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단 하나의 지점 – 나를 지탱해 주는 어떤 관계, 신념, 혹은 기억일지도 모르는 우리의 엔드핀 말이다.
소리 없이 존재하면서, 모든 소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 여러분의 엔드핀은 무엇인가? 봄의 첫날 재탄생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들으며 재클린의 연주를 음미해보자. 그리고 여유가 허락하면 ‘재클린의 눈물’도 함께 들어보면 어떨는지?

이전 칼럼 [김학천 타임스케치] 누가 마이크를 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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