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광복절에 한겨레 신문은 윤석열 대통령의 기념사에서 ‘자유’만 33번 외치고 ‘통합ㆍ협치’는 언급도 안했다고 비아냥대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런데 나는 이 자유라는 말이 진정 반가웠다. 흔히 우파에는 감동적 서사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그리고 이번 8.15 경축사에서도 일관되게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며 근대한국의 역사를 자유를 획득하고 확산시켜온 과정으로 풀어나갔다.
나의 대학 시절에 자유는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의 핵심 가치였다. 대학생들은 ‘언론의 자유’, ‘학원의 자유’를 외쳤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유는 지식인 사회에서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말이 되었다. 자유를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자’로 매도당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에는 자유라는 말이 단 한 번 나왔다. 대신 문대통령은 ‘국민주권’을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내세웠고 국민주권의 정신이 촛불시위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윤대통령은 자유를 한국 근대사 담론의 키워드로 되돌려 놓았다. 그에게 독립운동 정신의 핵심은 자유였으며 해방 후 남한의 성공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는 자유의 물적, 제도적 기반을 일구는 과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물을지도 모른다. 독립운동가들이 자유를 위해 싸웠어? 그렇다. 자유는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서 신분철폐 다음에 명시한 핵심가치였다. 하물며 북한의 헌법도 평등 다음에 자유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비록 말뿐인 자유라 하더라도 말이다. 신분제도를 없애고 국민주권을 내세우는 근대국가는 자본주의 나라이든, 사회주의 나라이든 간에 인민은 이런 자유 저런 자유를 갖고 있다고 헌법에 명시한다.
서구의 근대 정치 사상에서 평등과 자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일체의 신분적 예속관계를 거부하는 평등사상은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천부인권론에 의해 정당화된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사상은 계몽주의 철학자 쟝자끄 루소의 그 유명한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든 그는 사슬에 매어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 사상은 사회계약론과 법에 의한 지배 (the rule of law)를 뜻하는 법치주의로 연결된다. 자유와 평등, 국민주권, 법치 등의 개념으로 구성되는 새로운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미국의 독립선언이 선포되었고 미국의 독립은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 유교적 국제질서였던 조공체제에서 자유, 평등, 독립 등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재필이 이끌었던 독립협회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조선의 자주성과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부터 세웠다.
서구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고자 열망했던 조선말기 선각자들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구현하는 정치체제를 꿈꾸었다. 이 열망은 합방으로 사그러들지 않고 3.1운동으로 폭발했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혁명의 이념적 토대였던 자유와 평등사상은 100여년이 지난 후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로 확장되었고 3.1 독립운동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영향받아 일어났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던 자유와 평등 사상은 문재인이 뜻하는 ‘국민주권’ 정신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의 ‘국민주권’은 병자호란 때 무조건 청에 항전할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선비정신에 가깝다. 유교적 의리론에 따르면 전쟁에서 굴복하는 것은 군자로서 명예를 잃는 행위였다. 이길 수 없어도 항복해서는 안된다.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나라를 잃은 선비가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는 것은 치욕적이었다. 이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을사조약 후 일부 대신들은 자결하였고 일부 유생들은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은 신식 무기와 장비도 없이 짚세기 신고 일본군과 싸웠지만 즉시 소탕되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건너가 무장항쟁을 도모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문 대통령의 유교적 인식은 친일청산을 집요하게 추구한 것에 잘 나타난다. 사실 죽을 때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은 말이 쉽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을 이길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식민지 체제에 저항하지 않았다. 문 정부는 식민지 체제에 순응한 엘리트들을 친일 부역자, 변절자로 낙인찍었다. 군주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청에 항복할 것을 주장한 최명길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주류 유학자들로부터 역적으로 비난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부역자를 처단하는 친일청산이 바로 민족정기를 확립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존중하는 근대사회에서는 전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이길 가능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으면 항복하는 것이 국제적 관행이다. 포로들은 인도적 대우를 받게 되며 항복한 것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명예로운 병사로 자부한다. 국제 규약에 따라 본국에 통보하여 가족들이 자기가 살아있음을 알게 한다.
독립운동에 대한 문 대통령의 전근대적 인식은 촛불혁명이 독립운동의 국민주권 정신을 계승한다는 선언에서 정점을 이룬다. 국민주권을 표방하는 근대국가에서 국민의지 혹은 국민의 뜻은 법을 통해 표현되지 시위나 여론을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을 선포한 주체는 헌법 전문에 씌여진대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다.
미 연방 헌법 전문에도 “We the People”이 헌법을 확립하는 주체로 나온다. 법을 통해 ‘국민’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헌법을 개정할 때는 반드시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국민이 주인이라는 국민주권 사상은 국민의 이름으로 선포된 법의 지배 (the rule of law)를 받는다는 뜻이지 촛불시위나 횃불 시위의 지배를 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여론 정치는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여론정치가 아니다. 작금의 여론 정치는 졸저 <신양반사회>에서 설명했듯이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공론정치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이다.
민주사회에서 여론이나 민심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국민의 명령’ 혹은 ‘시민의 명령’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시민 개인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롭게 합리적으로 사고할 줄 안다는 전제 하에 누구나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제도이다.
자유를 거듭 강조한 윤석열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이제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짚고 있다. 그는 친일청산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힘이 없어 항복한 이들을 어찌 비난할 수 있을까? 일제시대 엘리트들을 독립을 위해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데 매진한 지도자들이라고 포용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8.15 연설에서 언급했듯이 독립운동은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지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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